배너 시안이 올라왔습니다.
보자마자 뭔가 아쉬운데 정확히 뭐가 아쉬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장을 보냅니다.
“조금 더 눈에 띄게 해 주세요.”
디자이너는 색을 바꾸고 글자를 키웁니다.
두 번째 시안도 어딘가 다릅니다.
이번에는 “좀 더 고급스럽게”가 나갑니다.
혹시 이런 장면이 익숙하신가요?
1. 시안 수정이 세 번을 넘어가는 일이 흔하다
2. 수정 요청이 대부분 형용사로 끝난다
3. 완성본을 보고 나서야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게 된다
이건 디자이너의 실력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디자인이 시작되기 전에
무엇을 말할지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정하는 문서가 소재 기획안, 흔히 말하는 브리프입니다.
소재 기획안(브리프)이란? 디자인 전에 정하는 ‘무엇을’
소재 기획안은 광고 이미지나 영상을 만들기 전에
이 소재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할지 적어 두는 문서입니다.
영어로 브리프(brief)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짧게 요약한 지시서라는 뜻입니다.
저희가 기획안에 반드시 넣는 칸은 여섯 개입니다.
키워드, 메인 카피, 서브 카피, 비주얼, CTA, 요청사항.
그중 키워드는 빠지면 안 되는 필수 칸이고,
나머지는 소재 형식에 따라 비중이 달라집니다.
역할을 나누면 이렇습니다.
기획자는 ‘무엇을’ 정하고, 디자이너는 ‘어떻게’ 보이게 합니다.
무엇을 말할지, 누구에게 말할지, 무엇을 보여 줄지는 기획자가 정합니다.
그걸 어떤 구도와 색과 크기로 보이게 할지는 디자이너가 제안합니다.
이 경계가 흐리면 두 가지 일이 생깁니다.
기획자가 색과 폰트까지 지시하면 디자이너의 판단이 사라지고,
기획자가 아무것도 정하지 않으면
디자이너가 기획까지 떠안게 됩니다.
둘 다 결과물이 좋아지기 어렵습니다.
기획안이 길 필요는 없습니다.
한 장, 여섯 칸이면 충분합니다.
중요한 건 분량이 아니라
디자이너가 첫 시안을 그리기 전에 같은 그림을 보고 있느냐입니다.
그 한 장이 있으면 피드백도 “이 칸이 안 보입니다”로 바뀝니다.
왜 디자인보다 기획이 먼저일까요
“일단 시안부터 보고 정하자”는 말은 빨라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가장 느린 방법인 경우가 많습니다.
숫자로 한 번 보겠습니다.
아래 시간은 이해를 돕기 위한 가정입니다.
기획안 없이 시작하면
첫 시안을 보고 방향을 정하고, 다시 고치고, 또 고칩니다.
시안 한 번에 디자이너 작업 1시간 30분,
기획자 검토와 피드백 30분이 든다고 해 보겠습니다.
첫 시안과 수정 4회면 5회 × 2시간 = 10시간입니다.
기획안을 먼저 쓰면 작성에 1시간이 듭니다.
대신 첫 시안이 방향을 맞춰 나오니
첫 시안과 수정 1회, 2회 × 2시간 = 4시간이면 됩니다.
합쳐서 5시간입니다.
같은 소재 하나에 다섯 시간이 차이 납니다.
시간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수정이 길어지면 처음 말하려던 메시지는 흐려지고
“이번엔 빨간색이 낫네” 같은 취향 토론이 남습니다.
기획안은 디자인을 늦추는 서류가 아니라
수정의 기준을 미리 정해 두는 약속입니다.

여섯 칸이 각자 하는 일
설명을 위해 가상의 접이식 트렁크 정리함을 예로 들겠습니다.
칸이 세 개로 나뉘고, 쓰지 않을 때는 납작하게 접힌다고 가정합니다.
실제 제품이라면 사양부터 확인한 뒤 적어야 합니다.
키워드(필수): 반드시 들어갈 단어
소재 어딘가에 꼭 들어가야 할 단어입니다.
고객이 검색하거나 떠올리는 말,
이번 소재가 맡은 핵심 개념이 여기 들어갑니다.
‘트렁크 정리함’, ‘접이식’ 같은 단어입니다.
키워드가 필수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멋진 카피를 쓰다 보면 정작 무엇을 파는지 단어가 빠집니다.
이미지에서 키워드를 가렸을 때 제품이 뭔지 모르겠다면
키워드가 일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인 카피: 첫 시선이 머무는 한 문장
화면에서 가장 먼저 읽히는 문장입니다.
누구의 어떤 상황을 다루는지 알려 줍니다.
“장 본 날 트렁크, 봉지가 굴러다니지 않게”처럼
고객이 자기 장면을 떠올릴 수 있으면 됩니다.
메인은 하나만 정합니다.
서브 카피: 메인이 열어 둔 질문에 답하기
메인 카피를 보고 “어떻게?”가 생겼다면
서브 카피가 답합니다.
“칸 세 개로 나눠 담고, 안 쓸 땐 접어 두세요.”
서브는 메인을 다른 말로 반복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비주얼: 무엇을 보여 줄지
예쁜 사진이 아니라 설명하는 장면을 정합니다.
장바구니 물건이 칸별로 서 있는 트렁크 위 시점,
접힌 정리함을 한 손으로 드는 장면 같은 것입니다.
구도와 색감은 디자이너가 제안할 수 있게 열어 둡니다.
CTA: 누른 다음에 무엇을 보게 되는지
“지금 구매”보다 “내 트렁크에 맞는 크기 확인”처럼
클릭한 뒤에 확인할 내용을 알려 주는 문구입니다.
도착할 페이지에서 그 내용을 실제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요청사항: 디자이너가 꼭 알아야 할 조건
규격과 지면, 잘리는 영역,
필수 표시 문구, 써서는 안 되는 표현,
이번에 비교하려는 요소와 고정할 요소를 적습니다.
제목은 확정이고 구도는 제안을 받고 싶다면
그 재량의 범위도 여기 씁니다.

칸을 채울 재료는 어디에서 가져올까요
여섯 칸이 비어 있으면 막막합니다.
그런데 각 칸의 재료는 이미 다른 곳에 있습니다.
기획안은 새로 지어내는 문서라기보다
흩어진 재료를 한 장에 모으는 문서에 가깝습니다.
메인 카피의 재료는 고객의 말입니다.
제품의 USP, 즉 고객이 얻는 가장 큰 이익이 먼저 정해져 있어야
메인 카피가 어느 쪽을 볼지 흔들리지 않습니다.
후기와 문의, 반품 사유에 반복되는 불편이 있다면
그게 첫 문장의 출발점입니다.
“트렁크에서 봉지가 쓰러져요”라는 말이 자주 보인다면
굳이 ‘스마트한 수납 솔루션’ 같은 말을 새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서브 카피와 비주얼의 재료는 제품의 사실입니다.
칸이 몇 개인지, 어떻게 접히는지,
바닥에 미끄럼 방지 처리가 있는지를 사양서와 실물로 확인합니다.
확인하지 못한 사양은 기획안에 ‘미확인’이라고 표시합니다.
빈칸보다 ‘미확인’이 낫습니다.
디자이너에게 넘기기 전에 누가 확인할지 보이기 때문입니다.
CTA의 재료는 도착 페이지입니다.
상세페이지에 크기표가 있다면 ‘크기 확인’,
구성 비교가 있다면 ‘구성 확인’처럼
실제로 있는 정보를 기준으로 문구를 고릅니다.
도착 페이지에 없는 정보를 CTA로 약속하면
클릭은 받아도 고객은 바로 나갑니다.
키워드의 재료는 검색어와 고객의 호칭입니다.
고객이 ‘트렁크 정리함’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카 오거나이저’라고만 쓰면 연결이 끊깁니다.
기획안의 단어는 회의실이 아니라
고객이 쓰는 말에서 고릅니다.
나쁜 요청과 좋은 요청은 무엇이 다를까요
기획안이 있어도 수정 요청이 형용사로 나가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요청은 무엇이, 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나쁜 요청: “좀 더 눈에 띄게 해 주세요.”
좋은 요청: “메인 카피와 서브 카피 크기가 비슷해서 첫 시선이 갈립니다. 메인을 우선하고 서브는 한 줄 아래로 분리해 주세요.”
앞의 요청을 받은 디자이너는 무엇을 바꿔야 할지 추측해야 합니다.
뒤의 요청은 문제와 원하는 결과가 함께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할지는 여전히 디자이너가 고를 수 있습니다.
나쁜 요청: “제품이 더 고급스러워 보였으면 좋겠어요.”
좋은 요청: “칸 세 개가 구분되는 게 이번 핵심인데, 지금 각도에서는 가운데 칸이 가려집니다. 칸이 모두 보이는 위쪽 시점으로 바꿔 주세요.”
‘고급스러움’은 사람마다 그림이 다릅니다.
‘칸이 보여야 한다’는 누가 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정 요청은 취향이 아니라
기획안의 어느 칸이 전달되지 않았는지로 씁니다.
“일단 여러 버전 뽑아 주세요”도 조심해야 합니다.
기준 없이 만든 다섯 개는 다섯 개의 취향일 뿐입니다.
여러 안이 필요하다면
“메인 카피는 고정하고 비주얼만 두 가지”처럼
무엇을 비교할지 정해서 요청합니다.

가상 트렁크 정리함으로 기획안 한 장을 완성해 봅니다
이제 여섯 칸을 실제로 채워 보겠습니다.
아래는 실제 브랜드나 기존 광고와 상관없이 새로 만든 예시입니다.
사양과 문구는 실제 제작 전에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목적: 장보기 짐 정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칸 구조를 이해시키고 상세페이지 크기 정보로 연결
고객 상황: 주말에 장을 보고 오는 길, 커브를 돌 때마다 트렁크에서 봉지가 쓰러지는 소리가 신경 쓰이는 사람
키워드(필수): 트렁크 정리함, 접이식
메인 카피: 장 본 날 트렁크, 봉지가 굴러다니지 않게
서브 카피: 칸 세 개로 나눠 담고, 안 쓸 땐 접어 두세요
비주얼: 트렁크 위에서 내려다본 정리함, 칸마다 세워 둔 장바구니 물건. 보조 컷으로 접힌 정리함을 한 손으로 드는 장면
CTA: 내 트렁크에 맞는 크기 확인
요청사항: 1080×1080, 1080×1350 두 규격. 칸 세 개가 모두 보이게. ‘무엇이든 다 들어가는’ 같은 표현 금지. 메인 카피는 확정, 구도와 색은 제안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비주얼 두 안만 비교합니다.
이 기획안을 받은 디자이너는
무엇을 크게, 무엇을 작게 둘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칸이 보이는 각도를 고민하고,
메인 카피가 봉지 위에 겹치지 않는 배치를 제안할 겁니다.
반대로 제품을 배경처럼 작게 놓고 할인 숫자만 키운 시안이 왔다면
이제는 이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쁘지 않다”가 아니라
“이번 핵심인 칸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고요.
좋은 기획안은 좋은 질문을 부릅니다
기획안이 잘 쓰였다는 건
디자이너가 질문을 하나도 안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이 빨리 나옵니다.
“칸 세 개를 다 보이게 하면 제품이 작아지는데, 보조 컷으로 나눌까요?”
“접힌 모습을 메인에 넣을까요, 서브에 넣을까요?”
이런 질문은 기획안의 칸을 기준으로 나오기 때문에
답하기도 쉽습니다.
이번 소재의 핵심이 칸 구조라면 메인 컷은 칸,
접히는 장면은 보조 컷으로 정하면 됩니다.
질문이 취향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묻는다면
기획안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안을 확인할 때는 실제 노출 크기로 줄여서 봅니다.
작업 화면에서는 잘 보이던 서브 카피가
휴대폰 피드 크기에서는 읽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글자를 키우기보다 문장 수를 줄이는 쪽을 먼저 검토합니다.
기획안을 넘기기 전에 확인할 것
상세페이지에도 메인 카피가 약속한 정보가 있는지 확인합니다.
광고에서 ‘크기 확인’을 누르게 했는데
상세페이지 첫 화면이 컬러 소개라면 고객은 길을 잃습니다.
가격과 구성이 바뀌면 이미 승인된 시안도 다시 봐야 합니다.
광고 표시나 판매 조건처럼 빠지면 안 되는 문구도 요청사항에 넣습니다.
디자인이 끝난 뒤에 끼워 넣으면 배치가 다시 흔들립니다.
사용할 사진과 서체, 아이콘의 사용 범위도 함께 적어 둡니다.
다른 광고에서 본 문구나 구도를 그대로 옮기라는 요청은 넣지 않습니다.
참고 자료가 있다면 ‘무엇이 좋아서 참고하는지’까지 적어야
디자이너가 겉모양이 아니라 원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기획안이 있으면 결과를 보고도 고칠 곳이 보입니다
소재가 집행된 뒤에도 기획안은 쓸모가 있습니다.
반응이 약할 때 어느 칸을 고칠지 찾는 지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클릭은 적은데 본 사람은 많다면
메인 카피나 비주얼이 고객의 장면과 멀었을 수 있습니다.
클릭은 많은데 구매가 적다면
CTA가 약속한 정보가 도착 페이지에 없는지 봅니다.
물론 가격, 시기, 노출 대상도 함께 영향을 주니
숫자 하나로 원인을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다음 소재는 한 칸만 바꿉니다.
메인 카피는 그대로 두고 비주얼만 바꾸거나,
비주얼은 두고 메인만 바꾸는 식입니다.
한 번에 여섯 칸을 다 바꾸면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기획안 아래에 짧게 적어 둡니다.
“비주얼 A: 칸 위쪽 시점, 비주얼 B: 접는 장면.
두 안 모두 메인 카피 동일.”
이렇게 쌓인 기록은 다음 기획안의 재료가 됩니다.
기획안은 한 번 쓰고 버리는 문서가 아니라
다음 소재를 더 빨리 정하게 해 주는 기록입니다.
자주 받는 질문
Q. 작은 배너 하나에도 기획안이 필요한가요?
길게 쓸 필요는 없습니다.
여섯 칸을 한 줄씩만 채워도 됩니다.
작은 소재일수록 들어갈 말이 적어서
무엇을 뺄지 정하는 기획이 더 중요합니다.
Q. 디자이너가 기획까지 같이 하면 안 되나요?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때도 문서로 남겨야 합니다.
누가 쓰든 여섯 칸이 정해진 상태에서 디자인이 시작돼야
나중에 같은 기준으로 시안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만 있는 기획은 담당자가 바뀌거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특히 외부 디자이너와 일한다면 문서가 유일한 공통 언어가 됩니다.
Q. 키워드는 왜 꼭 필수인가요?
소재가 무엇을 파는지 알려 주는 최소한의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카피가 감성적일수록 키워드가 빠지기 쉽고,
그러면 멈춰서 본 사람도 제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디자인은 기획을 보이게 만드는 일입니다.
보일 것이 정해져야 잘 보이게 만들 수 있습니다.
대표님들, 다음 소재를 요청하기 전에
여섯 칸만 먼저 채워 보세요.
키워드, 메인, 서브, 비주얼, CTA, 요청사항.
한 칸이라도 비어 있다면 그게 지난번 시안이
세 번씩 고쳐졌던 이유일 수 있습니다.